우리나라에서 소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으로 소급된다. 기원전 1,2세기때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김해의 조개무덤에서 소의 이빨이 나오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에 보면 그 당시 소를 길렀다는 것과 전쟁때는 하늘에 바치고 소 발톱이 합해 있으면 길하고, 갈라져 있으면 불길하다는 점도 쳤었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3년(502년)에 처음 소로 밭을 갈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서기 357년에 만들었다는 만악 3호분 벽화에 누렁소, 검둥소, 얼룩소가 구유에 담긴 여물을 먹고 있는 모습들로 미루어 보아, 지증왕 이전에도 소가 논밭을 갈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렇게 우리 민족과 더불어 2천여 년 간이나 함께 살아온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 집에서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든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고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 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월 들어 첫 번째 맞은 축일(丑日)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고 한다.
 
원래 소싸움이란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오기를 신라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이 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되어 부락단위로 번져 서로의 명예를 걸고 가세(家勢) 또는 족세(族勢) 과시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보통 추석날에 소싸움을 벌였는데, 싸움날 아침이 되면 소 주인은 소를 깨끗이 씻어준 뒤에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장식하며 목에 큰 방울을 달아준다.
순서에 따라 도감이 호명하면 주인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소와 소 사이에는 포장을 쳐서 가려두어 미리 싸우지 않도록 한다.
싸움소는 힘과 투지를 자랑하려고 '범소','담부소', 곧 담비소,'전디기소' 곧 견디기소 같은 이름을 붙여서 싸움판에 내놓는데 싸움에 이긴 소는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주인을 따라 목에 오색끈을 두르고 당당히 시내를 가로질러 승리의 시위 행렬을 벌였다.
일부 문헌에는 1949년부터 소싸움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1934년에 사용된 소싸움을 배경으로 한 우표를 볼 때 훨씬 이전에 이미 소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싸움에 대한 자료는 위암 장지연선생이 1909년에 '진양잡영'12수를 발표하면서 소싸움의 내용을 담은 시가 10-11번째의 시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 시를 통하여 "탕지의 투우가 실히 성하여 천백명의 같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하고 표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고 소싸움을 평했다.
 

소싸움대회장에서 가장 많은 질문은 “저 소들이 왜 싸우느냐?” 다.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싸움소니까”
좀더 학술적으로 설명 하자면, 영역확장 및 종족번식을 위한 세(勢) 싸움이라고 답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문명이, 과학기술이 발전했다지만 전래풍습, 전통놀이 등의 기원을 정확히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구전(口傳), 고(古) 문헌(文獻)에 의해 추측할 뿐이지.......

소싸움의 유래역시 마찬가지다.
이 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하면서부터 라는 설(說)이 있는가 하면, 막연하게 신라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됐건 적어도 이 땅에 소라는 생명체가 나타난 시절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소싸움이 생겨났고, 이를 지켜보던 목동들에 의해 놀이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계승 발전되어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전국팔도 어느 지역이건 소를 사육하지 않는 지방이 없건만 청도, 진주, 의령 등 유독 영남권에서 소싸움을 즐기고 이를 지역문화축제로 까지 발전 시켰다는 것이다. 이 역시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경상도 사나이들의 우직하고, 뒤끝이 없는 성질이 소싸움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이제는 당당히 지역문화축제로,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문화상품으로 발전되어갈 소싸움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민족의 협동ㆍ단합을 막기 위해 이를 강제폐지 시켰는가 하면 해방을 맞아 부활의 조짐이 보이던 시절, 6.25로 또다시 그 명맥이 일시 중단되는 아픔을 격기도 했다. 이렇게 명맥이 끊어지는 듯 했던 소싸움이 영남의 몇몇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소생시켜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호남권에서도 소싸움이 지역문화행사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에 와서 소싸움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 되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우선 관련 단체를 살펴보면, 전국민속투우연합회(이하 연합회)가 있어 각 지역투우협회(이하 지역협회)의 행사를 총괄하고 있으며, 연합회 산하 11개 지역협회가 있다. 지역협회의 구성을 보면 경북에 “대구, 청도투우협회” 가 있으며, 경남지역에 “김해, 의령, 진주, 창녕, 창원, 함안투우협회” 호남에는 전북의 “완주, 정읍투우협회” 충북에는 "보은투우협회"가 있어 총 11개 지역협회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11개 지역협회가 연중 개최하는 소싸움대회는 적게는 10회 많게는 15회 정도의 전국규모의 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매년 3월 전국 최대 규모의 청도국제소싸움대회를 시작으로 의령, 정읍, 진주, 창원, 창녕, 대구, 김해, 함안 등 그 순서는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혹서, 혹한기를 제외한 매달 1~2개 대회가 순차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2003년 서울, 부천, 2004년 부산 등, 대도시의 초청경기를 통해 점차 그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청도 국제소싸움대회는 진주 등에 비해 그 역사는 짧지만 명실상부한 소싸움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기까지 남다른 노력이 숨어 있다.
그 기원과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절부터 부락단위, 또는 씨족단위의 세 과시를 위한 소싸움이 씨름과 더불어 추석놀이로 전래 되어 오다 농촌문화의 도시화에 따라 청도소싸움역시 지리멸렬(支離滅裂) 하는 듯했다.
1990년 친목단체인 청도투우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한 제1회 영남 소싸움대회를 개최할 당시만 해도 청도 지역에는 싸움소의 수가 미미하여, 김해, 진주 등 인접지역의 싸움소들을 모셔오다시피 하여, 50여두의 적은 수로 겨우 대회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1994년 5회 대회 까지만 해도 그저 소싸움에 미친 몇몇 사람의 그들만의 놀이로 취부 되었다.
이렇게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동안 소싸움의 매력에 빠지는 사람이 하나, 둘 늘게 되고 이들이 직접 싸움소를 사육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1995년 여타 대회와 비교하여 규모면에서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외형적인 성장을 하게 되면서 자치단체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지상매체, 방송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매년 대회 규모가 급성장 하여 전국 최대 규모의 소싸움대회로 자리 잡게 되고 타 지역투우협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1999년에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챔피언을 지낸 싸움소 3두가 청도를 찾게 되고 때를 맞춰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의 10대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어 국제적인 행사로 그 위용을 드러낸다. 이제는 단순한 소싸움축제가 아닌 관람객에게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미군로데오경기를 비롯한 농경문화 체험장, 소달구지 타기, 사진전, 소 그림전등 관람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청도군, 청도투우협회의 노력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일취월장을 거듭하던 청도국제소싸움대회가 2001년에는 구제역이란 복병에 막혀 일정이 수차례 연기 되는 등, 개최 여부조차 불투명 하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전국의 소싸움애호가들은 청도군청으로 항의성 전화를 해오게 되고, 애호가들의 열정에 구제역도 항복을 한 듯, 마침내 그해 5월, 5일간의 축제가 성대히 막을 내리게 된다.
2003년에는 청도소싸움이 서울 하이페스티벌의 초청을 받아 동대문 운동장에서 2일간 의 열전과 동대문 운동장을 출발 광화문에 이르는 퍼레이드에서 서울시민의 열화와 같은 갈채 받으면서 소싸움의 대도시 진출을 선포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듯 같은 해 부천영상단지에서 추석을 전후로 10일간, 2004년 추석 부산무역센터 광장에서 4일간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시골 촌놈들의 놀이가 대한민국 전통관광문화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였다.

이제 청도소싸움은 또 한번의 대 변화를 위해 조용히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2002년 국회에서 전통소싸움경기에 관한법률의 제정을 계기로 경북청도군에는 상설소싸움경기장 개장이 임박해 있으며, 상설소싸움경기장이 개장됨과 동시에 세계최초로 우권을 발행하여 경마, 경륜과 같은 배팅 사업으로 소싸움이 새롭게 발전할 것이다.

바로 그 주역의 자리에 (주) 한국우사회가 오랜 인고의 세월을 굳건히 견뎌내고, 한국민속 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움츠렸던 날개를 서서히 펼치며 힘찬 도약을 꿈꾸고 있다.

 
- 가장 큰 차이점은 경주와 격투기라는 점
- 일반적으로 경주의 관전은 레이스 중반엔 큰 흥미를 제공하지 못하지만, 격투기는 시종 박진감 넘치는 경기로
  관전에 무료함이 덜하다.
  특히 사람은 피를 보면 흥분한다는 이론이 접목되는 격렬한 경기가 소싸움이다.
- 최근 젊은이들 사이엔 이종격투기가 상당히 인기가 높은데,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세태를 반영한다면,
  소싸움은 반드시 피를 보게 되므로 상당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배팅 사업의 특징으로 볼 때, 경마, 경륜, 경정은 경기참가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승부의 조작가능성이 높지만,
  소싸움의 경우 경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동물인 소이기 때문에 승부의 조작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 경주는 통상 참가인원이 최소 5명 이상이지만, 격투기인 소싸움은 1:1승부로 관전이나 승부의 예측이 단순하여,
  누구나 쉽게 놀이로 즐길 수 있다.
- 소싸움이 격투기이긴 하지만 태권도나 권투와 같이 득점방식이 복잡하지 아니하고, 승패의 판가름이 명백하여,
  판정의 불만이나 번복이 전무하다.
 
 
뿔 모양 설 명
노고지리 뿔
(찌르기공격에 유리)
- 날갯짓을 하는 노고지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뿔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모양.
옥 뿔
(뿔치기, 뿔걸이에 유리)
- 앞으로 휘어진 모양.
- 경상도사투리 의 영향을 받아 명명됨.
  (휘어졌다 = 옥았다)
- 다른 뿔 모양과 같이 불려지기도 한다.
  (예: 비녀옥뿔, 노고지리옥뿔)
비녀 뿔
(뿔치기, 머리치기, 목감기에 유리)
- 아낙네의 비녀를 닮은 모양.
- 옆으로 일자 뿔.
재 뿔
(변칙공격, 옆치기,들치기에 유리)
- 뿔이 뒤로 혹은 아래로 재껴진 모양.
짝 뿔
(뿔걸이, 받아치기, 들치기에 유리)
- 양쪽의 뿔 생김새나 뻗은 방향이 서로 다른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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